축구학개론

[축개론][번외] 연말연시 설레는 박싱데이(Boxing Day)

aw22 2020. 12. 24. 15:02

안녕하세요! 벤치남들입니다.

 

두 달여 만에 새 글을 올리게 됐습니다. 대부분의 관리자가 학생인지라 과제와 시험에 치여 산 것도 있고, 연말이라 이래저래 바쁘게 살다 보니 2020년의 끝자락이 되어서야 이렇게 다시 오게 됐네요. 이 글을 시작으로 다시금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갈 테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년은 코로나로 시작해 코로나로 끝나는 해가 될 것 같은데요. 물론 코로나는 내년에도 지속될 전망이긴 하지만, 연말연시에는 축구팬들이라면 설레할 일정들이 다가옵니다. 바로 '박싱데이(Boxing Day)'죠. 12월 중순~말일 동안 거의 매일 같이 축구 경기를 진행하다보니 축구팬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행복한 순간들이고 기다려지는 일정이기도 합니다. 뭐 선수들에게는 지옥 같은 일정이기도 하고, 이 시기에 얼마나 팀을 잘 운영하느냐에 따라 한 시즌의 성과가 좌지우지되기도 합니다. 아스날 팬인 필자로서는 이 박싱데이 기간을 버티지 못해 우승과 멀어졌던 순간들이 기억나기도(기억 폭행)합니다...ㅠㅠ

 

레스터전 웰벡의 극장골 때는 정말 아스날이 우승하는 줄.. ;  출처_telegraph

 

시국이 시국인지라 연말 느낌도 안 나고, 외출해서 친구들을 만나지는 못하지만, 늦은 밤에 집에서 혼자 맥주 한 캔 하면서 축구라도 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문득 요 며칠 새 축구를 보다가 박싱데이가 왜 박싱데이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시쳇말로 일정이 빡세서 박싱데이라는 말도 있긴 합니다만 이는 사실과 무관합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박싱데이에 대해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대부분의 독자들께서 궁금해하실 것으로 믿고(?) 오늘은 박싱데이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출처_thespruce.com

박싱데이란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을 가리키는 말로, 과거 영국과 영연방 국가에서는 이날을 휴일로 삼고 하인들에게 선물을 주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파격적인 할인가로 제품을 판매하는 크리스마스 전후의 쇼핑 시즌을 지칭한다고 하는데요. 뭐 우리에게는 미국의 영향이 더 커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가 쇼핑시즌으로서는 더 와 닿는 것 같네요.

 

박싱데이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대부분 크리스마스에 가난하거나 신분이 낮은 이들에게 선물을 베푸는 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정설로 여겨지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요.

 

첫째로, 중세시대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에도 일을 해야 했던 하인들에게 주인들이 그다음 날인 26일에 휴가를 주었었습니다. 이때 주인은 선물이나 보너스 혹은 크리스마스 당일 남았던 음식을 담은 상자를 하인들에게 건넸었는데요. 하인들이 가족과 함께 이를 나누며 휴가를 즐겼던 것이 지금의 박싱데이가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교회에서 크리스마스에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기부 상자를 만들어 헌금과 선물을 받은 뒤, 다음 날인 26일에 성직자가 이 상자에 모인 기부 물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 박싱데이가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크리스마스가 서양문화권에서는 종교적으로도 중요한 절기이다 보니 이러한 문화가 생기지 않았나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선물 주고받는 이야기를 하려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니, 이제 다시 축구 이야기로 넘어오도록 하겠습니다. 동양권 문화에서도 그렇듯, 특정 명절이나 절기에서 그에 맞는 전통적인 놀이와 같은 무언가를 하는 것은 굉장히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여집니다. 영국에서는 12월 26일 박싱 데이에 축구 경기를 전통적으로 치렀는데요. 이는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에서 공통적으로 이어져 오는 전통입니다. 전통 자체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만, 다음과 같은 상황 속에서 박싱데이 일정은 정말 선수들에게 가혹하고 살인적인 일정이 되어버렸습니다.

 

다른 구기 종목과 다르게 체력소모가 굉장히 많은 축구이기 때문에, 한 주에 한 경기씩을 치르게 하는 것이 매우 일반적인 리그 편성인데요(리그 일정만을 고려 시). 그렇기 때문에 PL사무국은 리그 경기를 보통 주말 위주로 편성하고, 가끔씩 중계권 문제, 강팀 간의 빅매치 등 흥행을 고려하여 금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저녁까지 경기를 분산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박싱 데이에는 요일을 불문하고 무조건 경기를 편성시켜 놓기 때문에 운이 나쁘게 수요일이 박싱데이라면 '일-수-토'로 이어지는 정말 팬들이 좋아할만한 일정을 만들게 되는 것이죠.(간혹 흥행을 고려하여 한 경기쯤은 26일 전후로 잡거나 킥 오프 시간이 변동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흔히 팬들 사이에서 유럽 리그 중 어떤 리그가 제일 힘드냐는 등의 토론이 오갈 때, '박싱 데이 때문에 프리미어 리그 일정이 제일 빡세다'는 식의 주장이 나오기도 하는데요. 그도 그럴 것이,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에, 독일 분데스리가,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 이탈리아 세리에 A, 프랑스 리그 앙 등 유럽의 다른 리그들은 영국과 달리 오히려 크리스마스 시즌에 휴가를 보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영국은 대부분의 리그와 달리 컵 대회가 2개라 경기 수가 많고, 이로 인해 일정까지 빡빡해집니다. 결국 선수단과 감독은 골머리를 앓게 되니 위와 같은 주장들이 많이 형성되는 것이겠죠. 

 

이러한 박싱 데이 전통이 잉글랜드 축구협회의 상술로 연휴에 흥행 요소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일정을 짠 게 아니냐는 시각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박싱 데이 전통은 잉글랜드뿐만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의 축구 리그에서도 지켜지고 있으며, 호주나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에서도 박싱 데이에 크리켓을 하는 등 영연방 국가 전체의 전통인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잉글랜드에서 다른 리그처럼 겨울 휴식기를 도입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박싱 데이 전통을 언급하며 반대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아스날의 아르센 벵거 前 감독도 "박싱 데이 전통은 오래된 것이며, 박싱 데이에 축구 경기가 없으면 슬플 것 같다"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박싱 데이 전통 때문에 PL의 경기일정이 빡빡하다고 얘기하지만 다른 리그의 경우에도 빡빡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리그앙의 경우에도 컵 대회가 2개이기 때문에 경기수에는 차이가 없으며, 프리메라 리가의 경우에도 컵 대회인 코파 델 레이가 단판이 아닌 홈 & 어웨이로 치러져 경기수 자체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리그가 동기간에 적게는 16일에서 많게는 1달 가까이 연말 휴식기를 가질 때 쉬지 않고 연이어 경기를 치르는 것은 선수들에게 체력적인 부담을 안기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실 제일 큰 문제는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리그 경기는 주로 주말에 하는데 박싱 데이는 요일에 상관없이 26일로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말에도 경기하고 박싱 데이에도 경기를 하고 새해 첫날이라고 또 축구하는 날을 편성하게 되니 일정이 빡빡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박싱 데이가 수요일이라면 그나마 양호하지만 화요일이나 목요일이면, 토요일에 경기한 다음 달력 기준 이틀 쉬고 3일째 화요일에 또 뛰거나, 목요일에 경기하고 경기 없는 날 이틀을 쉬고 일요일에 다시 뛰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빅매치 대진까지 우연찮게 박싱데이 시즌에 겹치게 되면, 사무국에서 그 경기만 쏙 빼서 다른 요일로 바꿔 편성하다 보니,매년 12월 박싱데이~연말연시 기간이면 만 48시간도 못 쉰 채로 두 경기를 하루 건너뛰게 되는 팀이 꼭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박싱 데이가 무슨 요일이냐에 따라 일정이 빡빡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박싱데이=빡센일정'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영국의 전통을 기반으로 한 일정이라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2016년의 박싱 데이는 월요일인지라 2016-17 시즌 PL의 12월은 17~18일 주말에 리그 경기를 하고 일주일 쉬고 박싱 데이에 경기하고 또 일주일 쉬고 31~1일 주말에 경기를 하는 아주 상식적인 일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짚어보자면, 극도로 짧은 기간 동안 팀들이 연이어 경기를 치르도록 하여 이 기간 동안 선수들의 피로가 극한에 달한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러한 것들이 심해지면 이로 인해 선수들의 부상이 발생하기도 하는데요. 이를 방지하기 위해 PL의 팀들은 선수단 뎁스에 많은 투자를 하게 되었으며, 이에 유럽리그의 팀들 중 가장 로스터를 방대하게 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도입한 홈그로운 제도와 맞물려 가뜩이나 한정된 로스터가 더욱 빡빡하게 되어버렸고, 이에 결국 PL도 2019-20 시즌부터 겨울 휴식기를 도입했지만 다른 리그처럼 크리스마스 전후가 아닌 1월 말부터 2월 초까지 휴식기로 정해 박싱 데이 경기는 계속 유지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속에서 무관중으로 경기를 치르는 양 팀 ; 출처_bbc


다만 2020-21 연말연시에는 아예 박싱데이가 주말로 잡혀서 매우 상식적으로 1주일 간격 일정이 완성될 줄 알았으나 이 시즌은코로나 19판데믹이라는 전례 없는 변수로 인해 매주 2경기 이상을 치르는 괴기스러운 일정이 짜였습니다(힝 속았지?). 평소와 같았더라면 박싱데이는 모든 팀들과 한 차례씩 붙은 후 시즌의 절반을 도는 반환점이었겠지만 2020-21 시즌은 평년보다 늦게 시즌을 시작하고 박싱데이 즈음엔 프리미어리그 전체 38라운드 중 15라운드밖에 진행을 못 한 지라 '시즌 반환점을 도는 크리스마스 연휴에 5월의 최종 우승팀을 점쳐보는 박싱데이의 상징성'이 다소 퇴색된 상황입니다. 애초에 축구 외적으로 영국 전역이 코로나 19 때문에 봉쇄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나 연말 분위기를 즐길 여력이 없는 우울한 박싱데이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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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K리그에서도 박싱 데이만큼은 아니지만, 리그 주중 경기를 여름에 대거 편성해 국내 축구 팬들의 원성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리그 초반에는 아시아 챔피언스리그(ACL) 때문에 주중 경기를 넣기가 애매하고, 춘추 제인 리그 특성상 3월 초에 시작하여 11월 중순에 리그가 끝나다 보니 경기일정을 짜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결국 ACL과 A매치 휴식기에 해당하는 여름에 시간이 남다 보니 대부분 경기를 여름에 몰아넣는데요. 이 때문에 FA컵과 리그 일정이 겹치는 팀의 경우, 7~8월의 제일 더운 시기에 주중 휴식 없이 매주 2경기를 2달 내내 하는 최악의 스케줄을 소화해내야 하는 상황도 생깁니다. PL의 박싱 데이가 한 해 농사의 중요한 포인트가 되듯이, K리그의 경우 시즌 초반에 돌풍을 일으키던 팀들이 여름의 혹독한 일정을 넘지 못하고 리그 후반기에 소리 소문 없이 하위권으로 추락하는 경우가 많았고, 초반에 부진했던 팀이라 할지라도, 여름의 강행군을 이겨내고 후반기에 다시 치고 올라오는 등 팀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시기가 되기도 합니다.

 

자, 오늘은 박싱데이에 관련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사실 종목을 막론하고 전 세계 어느 리그 일정표를 보더라도 강행군이 포함된 일정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 시기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보내느냐가 아마 해당 시즌의 성패를 좌우하는 포인트가 되겠죠. 앞으로 펼쳐지는 PL의 일정들, 그리고 다른 리그들의 경기를 지켜보면서 어떤 팀들이 이러한 시기를 현명하게 보내고, 리그 말미에 웃게 될지 지켜보는 것도 축구를 보는 또 하나의 재미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추운 겨울, 코로나 19로 인해 더 우울하고 춥게 보내고 있는 것 같은데, 몸 건강히 보내시고! 저희는 다른 칼럼으로 또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Merry Christmas!!

 

Written by 문세찬

Edited by 배기찬